시트로엥은 독특한 디자인을 즐겨한다. 시시각각 변하는 유행에 발맞추면서도 자신들만의 철학을 더하는 모습이 좋다. 이는 거의 집안 내력이나 다름없다. 1980년 파리모터쇼에서 등장한 카린(Karin) 콘셉트를 예로 들고 싶다. 1970~1980년대를 강타한 쐐기형 디자인 자동차 유행 속에서도 시트로엥만의 똘끼(?) 충만한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냈기 때문이다.




카린 콘셉트의 디자인은 피라미드를 닮았다. 위를 향한 곳곳의 선이 모여 지붕을 이루는 형태가 인상적이다. 옆에서 보면 완전한 정삼각형은 아니다. 승객의 머리 공간 확보를 위한 구성 같다. 디자이너는 트레버 피오레(Trevor Fiore). 1937년 영국에서 태어난 그는 1952년 자동차 제조사인 스탠더드 모터 컴퍼니에서 설계와 디자인을 시작했다.




이후 경력을 쌓은 그는 전설적인 산업 디자이너인 레이몬드 로위(Raymond Lowey)를 거쳐 자동차 바디 제작사인 피소레(Fissore)로 자리를 옮겼다. 이후 여러 자동차 제작에도 참여했다. 알핀(Alpine), 데 토마소(De Tomaso), TVR 등의 몇몇 모델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는 이유다.




일설에 따르면 그가 카린(Karin) 콘셉트를 만든 계기는 온전히 운이었다. 그는 1980년 1월에 시트로엥 수석 디자이너로 부임했는데, 당시 시트로엥은 파리모터쇼에서 선보일 신차가 없었다. 그래서 멋진 콘셉트카를 만들어 쇼에 내보내기로 했다. 양산 계획 없이 멋진 차만 만들어달라니, 디자이너의 생각을 온전히 펼칠 수 있는 기회나 다름없었다고 본다.




트레버 피오레가 남긴 초기 스케치를 보면 카린의 지붕은 아주 좁다. 좁은 지붕에서 곳곳으로 뻗어나간 선이 쐐기형을 완성하는 인상이다. 실제 모델에선 지붕이 조금 더 넓어지긴 했지만 특징은 고스란히 살렸다. 지붕의 크기가 A3 용지 한 장 정도에 불과하다고. 




실내도 인상적이다. 좌석 배열이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운전석을 가운데 달고 양쪽에 조수석을 붙인 구조로 볼 때, ‘이후 등장한 맥라렌 F1이 시트로엥 카린을 참조하지 않았나’란 생각이 든다. 운전자 중심의 계기판 및 버튼 배열도 매력적이다. 스티어링 휠을 중심 삼아서 모든 스위치를 배열해 언제든 쉽게 여러 기능을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타코미터 자리에는 조그만 브라운관을 달고, 스티어링 휠 가운데에도 숫자 패드를 붙였다. 컴퓨터의 도움을 받아 달리는 스포츠카가 생각이 난다. 허나 구동계는 대다수 시트로엥이 그렇듯 앞바퀴굴림 방식이었다. 유압식 서스펜션도 마찬가지다. 카린 콘셉트의 길이×너비×높이는 3,700×1,900×1,075㎜. 좁은 엔진룸에 구동계를 쑤셔 넣었을 엔지니어들의 고충이 떠오른다. 




당시 시트로엥은 카린 콘셉트의 디자인을 두고 “미래 자동차의 스타일링을 위한 시도”라고 밝혔다. 39년이 다 되어가는 2019년에 봐도 여전히 전위적인 느낌이 들어 놀랍다. 비록 그들이 생각한 미래와 다르게 요즘의 시트로엥은 많이 동글동글(?)하다지만, 자신들만의 철학을 담은 독특한 디자인은 여전하다. 




글 안민희 기자(minhee@drivestory.co.kr)

사진 시트로엥